‘홍천횡단’은 동서로 긴 홍천 지역을 지시한다. 양 끝의 두 지점이 물리적 거리의 한계와 그것을 잇는 연결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면, ‘생동의 축지법’은 그 연결에 부스터를 단 격이다*. ‘축지법’은 힘(=속도)과 힘의 감축을 동시에 구성한다. 힘을 빼고서 힘을 생성한다. 초월적 힘은 하나의 개체들로, 고대의 시간으로, 비합리적 언어 체계로 향한다. 곧 축지법은 각각 하나의 몸을 가정하며, 근대의 기계 문명과 다른 셈법을 요청하며, 가시적인 현실 질서를 흐릿하게 보존한다**.
실상, ‘홍천’은 행정 단위의 편재일 뿐 그 안의 실질적인 홍천의 언어들을 통합하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 홍천강은 홍천을 동서로 횡단한다. 그리고 예전부터 매우 오랫동안 다른 문화적 생산양식의 차이를 가져왔다. 따라서 ‘횡단’은 자연과 문명의 이중적 질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파생한다. ‘연결과 분리.’ 이러한 지역은 근대 수송 체계를 도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수한 별자리들을 잇는 하나의 대륙에 가깝다. 횡단은 또한 분단의 이미지를 미약하게 지지한다. 곧 분단에 대한 무의식이 굴절된 것일 수도 있다―남북에서 동서로.
축지법은 오늘날에는 가속화된 자본주의의 흐름에 예속되며, 속도의 도입에 따른 감산된 거리에 대한 지연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앞선 ‘하나의 개체들”이 예술가들이라면, 낭만주의적 시간의 질서를 재현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아마도 절대적인 고유명사와 비언어적 언어가 공존하는 본 제목으로부터 예상되는 바일 수 있다. 다시 축지법에서 횡단으로, 홍천으로, 곧 역순으로 되짚어 온다면, 의미는 갱신될 것이다. 도약과 연결, 그리고 지역에 도달하면, 초월의 개념은 현실의 몸이라는 한계와 만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공고한 것을 흐트러트리는 대신 접근하기, 투명한 것을 노출하는 대신 덧대기, 현재를 수용하는 대신 역사를 들여다보기. 아마도 그러한 방식들을 축지법으로서의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예술은 어떤 것에 대한 관점을 창안한다. 그 관점이 현실 너머에 다른 현실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은 유효하다. 그것이 하나의 유희이거나 속삭임이거나 가벼운 것이어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횡단은 ‘지역’에 관한 안팎의 오역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지역과 바깥의 위상차가 아니라, 지역 자체의 요철을 감각하는 것, 스스로의 변증법적 고양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는 것. 안의 입구를 조망하며 바깥의 출구를 정향하는 것. 어느 날 낯선 지역에 던져진 예술가들은 무언가를 붙잡아야 한다. 불안정한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안정화하거나 예술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초과된 지역의 이미지를 투과하는 자신의 연약한 신체를 조정하기 위해. 곧 우묵한 안과 튀어나온 바깥을 조율하는 신체 내 축지법을 가동시키기 위해. (김민관 큐레이터)
* 오스트리아, 독일, 한국의 12명의 작가는 두 팀으로 나눠 팔봉산과 오대산을 답사하며 ‘홍천횡단’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시작을 열었다. 홍천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팔봉산과 오대산이 각 지역의 상징적 거점이라면, 두 팀은 각자의 지역에 머물렀고, 따라서 횡단은 두 장소를 잇기보다 가지 않은 나머지 장소를 각각의 주체가 상상하는 방식에 가깝다.
** 팔봉산과 오대산 답사 이후, 두 팀은 마지막으로 동학혁명군 전적지에서 합류하며 물리적인 홍천 이동의 일정을 마쳤다. 곧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혁명을 꿈꾸던 이들을 ‘함께’ 기억하며, 현재를 되비쳐 보고자 했다.
*** 12명의 작가는 9월부터 답사를 포함해 홍천에서 한 달 살이를 시작했다. 특히 답사 이후에는 홍천 읍내에서 유휴공간으로 남은 중앙여관, 그리고 중앙시장 옥상에 자리한 분홍별관에서 작품을 완성시켰다.